노트 (24.02.20.)                                
강지웅
                              
사진은 종이 위에서 위태롭다. 언제라도 구부러지고, 늘어나고, 휘고, 흡수하고, 구겨지고, 찢어지고, 상처나고, 나부끼고, 변색되고, 젖고, 바랄 위험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사진이 어떤 방식으로든 멸균의 보존 시스템으로부터 이탈해 세상에 맞설 때 영속에 대한 낡은 확신은 비로소 모종의 혐의점을 갖게 된다. 만유인력이 무심하고도 철저하게 물성을 망가뜨리는 동안 베이지의 고운 입자들이 그물로 고정된 사진 위에 켜켜이 쌓여 마침내 인공물은 펄의 일부가 되거나 때로는 휩쓸려 유실된다. 

보정 어플에서 세피아 색 필터를 씌운 듯 펄이 두텁게 쌓인 이미지는 뜻밖의 애상감을 자아낸다. 이는 익명의 무덤으로부터 도굴된 파피루스나 악명높은 중세 위조 미술품을 연상시키며 종말 이후 사진이 필연적으로 처하게 될 운명을 예지한다. 말하자면 그 모든 것들이 잠시간 유기물로 존재했다가 다시 산산이 부서질 결말에 처한, 혹은 흩날리는 사뿐한 입자처럼, 혹은 언젠가 문명이 꽃피웠던 대륙의 사막에서 불어오는 미세한 먼지처럼 끝내 부수어져 ‘세기의 유적 발굴 신화’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믿음. 이내 골몰하는 예술이 허망하다는, 어떻게든 손 틈새로 흘러나가 거머쥐지 못하는 펄의 저주와도 같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럼에도 어떤 형태가 ‘일시적으로 영원하기’를 염원한다(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역행인가?). 행위에 낭만적 확신을 가지거나 믿음을 배반당하기를 반복하면서 작업의 당위에 대해 생각한다. 

'여기 용이 있으라(Here Be Dragons)*'라는 중세풍의 시대착오적 문장은 일면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에 새겨진 기도문처럼 들린다. 누군가 미래를 점지하면서 ‘여기에 용이 있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듯, '여기에 용이 있기를 바란다’고 염원하는 듯. '어쩌면 여기 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빗나간 적 없는 슬픈 예감의 문장같기도 하다. 열린 결말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관해 반추하게 하거나, 부재하는 대상에 대한 거짓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어쩐지 테마파크의 다크라이드(Dark Ride)** 어트랙션을  연상시키는 제목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빛의 출구를 향해 질주한다. 모든 예술은 본질적으로 소진의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흔들리는 믿음의 기계에 몸을 맡긴다.

*여기 용이 있으라(Here Be Dragons, 라틴어: HC SVNT DRACONES), 전시 제목으로 쓰인 ‘Here Be Dragons’는 중세시대 지도제작자들이 괴물 혹은 용을 사용하여 탐험되지 않은 미지의 바다너머를 지칭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파생된 라틴어 표현으로, 알지 못하는 지역에 대한 두려움이나 편향적 관점을 드러낸다. 지식 체계로 편입하지 못한 지형학 정보, 무지에서 비롯한 항해의 공포, 난파선이 가라앉은 바다를 암시하는 듯 느껴지는 제목은, 항해-탐험-귀환의 순서로 이루어지는 공간 방문에 대한 창작자의 기억과 빛바랜 작품을 통해 한차례 굴절되어 관객에게 전달되는 작업물의 추상적 인상을 은유한다.

**다크라이드(Dark Ride) : 차량 또는 배 등의 비히클(Vehicle)을 타고 쇼세트로 꾸며진 어두운 실내 속을 누비는 형식의  놀이기구를 뜻하는 용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