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출되어 있는 사진: 사진과 역사의 흐름 속에 있기/존재하기
콘노 유키
사진이 노출되어 있다—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진이 노출되어 있다는 표현은 동어반복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종이 위에 있는—기록된, 보이는 것은, 어딘가에 이미 있던=존재하던 것이 다시 (와) 있게 된 결과이다. 이를테면 노출은 사진이라는 매체의 근본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장면이나 사물을 비롯한 피사체가 자연스럽게 사진에 제 모습을 보인다. 노출되어 있는 사진에 어떤 모습이 보인다—드러낸다고 하기에는 덜 능동적이고, 어딘가에 이미 있던 것이다. 그렇다고 지향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사진을 받아보고 보는 사람의 눈에 그 모습이 비친다. 노출되어 있는 사진은 누군가가—의도적으로, 은연중에, 기계적으로, 우연히, 자연스럽게 담으려고 한 결과이다. 확신과 불신 사이, 아니 이 둘을 가로지르면서, 불안정하지만 어딘가로 향하는 태도로 사진은 무언가를 노출한다.
우리 눈에 노출된 피사체가 여기에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보이는 데 만족하지 않고 간직하고 싶은 것, 그리고 이제 곧 없어질 것—그렇게 서서히, 보는 방향에 변화가 생긴다. 있는 무언가를 기록하고 보여줄 때, 사진은 모든 시간을 과거라는 시제로 포획한다. 지금 여기(사진)에 있는 무언가는 다가올 미래,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불안정한 미래’의 음화가 된다. 이 선취된 미래는 캔버스 위에 물감이 쌓여 가면서 대상을 ‘새로이’ 보이는 회화와 다른, 매체적 호흡을 맞춘다. 사진에서 미래의 노출은 어떤 시공간을 기록하는 매체적 속성과 함께 살아가는데, 이 호흡은 쇠퇴의 얼굴을 보인다. 한때의 무언가로써 언제나 기록되는 사진은 낱장의 종이, 물에 빠뜨리면 고장나는 기계 장치, 데이터 파일의 이동과 가공할 수 있다. 물질적인 한계와 가변성을 가졌음에도 사진에는 많은 무게가 종종 실린다—역사적 장면, 한 사람의 인생, 사실을 위한 사건의 증빙자료처럼. 이 얼굴이 보는 사람을 본다. 노출되어 있는 사진은 누군가의 시야에 들어와 시선에 걸려 포획된다. 그러고선 누군가의 해석에, 시간의 흐름에, 천재지변에 노출되게 된다.
강지웅의 작업에서 노출된 사진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말 그대로 기법적인 단계이다. 작가는 종이에 인쇄한 사진을 갯벌에 들고 가서 그대로 두거나 그물에 고정한 후 며칠이 지나 다시 회수한다. 물결과 햇볕이라는 자연현상에 노출된 사진은 모래로 덮인 층을 얇게 남긴다. 밭고랑이나 능선처럼 모래가 자국을 남긴다. 그런가 하면 손으로 만진 흔적이나 인공물인 그물의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그의 작업, 이 노출되어 있는 사진에서 인위와 자연은 섞인 채 있다. 다른 하나는 섬돌모루라는 지역에 관계한다. 작가는 우연히 이곳을 인터넷에 올라간 블로그를 통해서 알게 된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 휴양지 개발이 시작되었다가 무산된 이곳을 방문한 어떤 사람이 남긴 사진—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장소와 사진 모두 쇠퇴의 시간을 향해가는 기록으로 남는다. 작가 또한 이곳을 방문하고 사진으로 남겼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번 전시에서 이미지는 결과적으로 장소가 가지는 서사나 역사, 심지어 블로그 주인과 작가의 일화에 깊이를 부여하는 대신 비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희석되는 면모를 보인다.
사진에서 노출은 피사체가 되는 존재의 발견과 변모를 매체적 특성에 조건 지어진다. 강지웅의 사진은 섬돌모루라는 한 장소의 역사를 발견한 결과물에 그치지 않는다. 장소와 연결된 이미지가 결과적으로 마모된 듯 어렴풋이 사진에 나온다. 섬에서, 시대에서, 그리고 재현에서 빠져나온 이미지가 여기에 있다. 그러면서도 완벽히 벗어난, 바꿔 말해 ‘탈피(脫避)’하는 대신, 흐름 속에 자신을 놓게 되는 태도로 거기에 있다. 노출되어 있는 사진은 흐름 안에 제 몸을 맡긴다. 장소를 둘러싼 일화가 소문으로 도는 것과 같이, 자료와 기록에서부터 서서히 추상적인 모습이 되어 간다. 그런데도 아예 아무것도 없음을 기록하지 않는다. 햇빛과 바닷물을 머금고 모래와 물결이 남은 사진은, 사진이라는 표현 기술의 역사와 과정을 몸소 기록하기도 한다. 카메라 옵스큐라 안에서 태양광에 의해 인화된 풍경의 상(像)이, 암실 안에서 현상액에 적신 종이에 남은 피사체의 상이, 그리고 인터넷상에서 거친 픽셀로 구성된 상이 강지웅의 작업에 기록된다. 벗겨진 모래의 입자는 사진의 역사라는 흐름을 기록하기도 한다.
작품을 보면 부분적으로 벗겨진 곳이 있다. 모래가 덜 올라가고 물결의 힘이 더 강하게 작용한 곳이겠다. 노출되어 있는 사진은 침식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퇴적의 기록이다. 파도가 지나가고 햇빛에 사진이 바래고 모래가 말라서 붙고 또 벗겨지기도 한다. 이 과정을 거쳐 나온 사진은 시간적이고 물질적인 퇴적과 침식, 이 두 힘의 흐름을 기록한다. 흐름을 기록한다는 말은 바꿔 말해, 흐름 속에 있다는 뜻이다. 이 흐름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소실로도,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로도 향하지 않는다. 햇빛에 이미지가 다시 찍힌 과거를 떠올리면서 종이 위에서 모래가 이미지를 만든다—곧 기록한다. 부분적으로 깨진 이미지가 파충류처럼 탈피(脫皮)를 반복한다—완벽한 탈피(脫避) 대신, 아니, 탈피에도 불구하고 남는 것이 사진에 있다. (脫皮는 극적인 변신이 아니라 반복에 기반한다.) 사진이라는 매체의 작업 과정과 사진의 역사라는 흐름 안에서 자신을 변주하면서, 강지웅의 사진 작업은 노출되어 있음에 제 모습을 보인다. 결과적으로—아니 잠정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사진은 쇠퇴 안에 발전 과정을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