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지표
김민경(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큐레이터)
1.
즐거운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진귀한 장면을 놓치지 않기 위해, 역사에 남길 기록이 필요할 때, 어김없이 카메라가 등장한다. 이제는 너무나 보편화된 카메라의 보급은 사진 찍는 행위를 취미 이상의 일상으로 만들어버렸다. 사진은 주어진 대상을 공간적인(혹은 시간적인) 연속체로서 포착한다.(Siegfried Kracauer, 1963) 그렇기에 사진은 피사체와의 강한 유사성을 기반으로 ‘대상이 이곳에 있었다’라는 분명한 연관관계를 내포한다. 카메라는 세상을 포착하고 사진으로 남김으로써, 그것을 물리적으로 소유하고 순간을 영원히 고정한다. 사진은 세계의 완벽한 재현을 꿈꾸며 기계적 복제를 바탕으로 원본의 반복적 소환을 가능하게 한다.
강지웅은 사진 매체에 기반한 작업을 지속 중이다. 이번 작업에서 작가는 사진이 지시하는 대상을 모호하게 지워내어 대상과의 유사성을 불분명하게 만든다. 지나치게 확대되거나 분절된 이미지, 의도적인 부식으로 인한 부분적 상실과 오염, 잘못된 인쇄에서 비롯된 중첩된 레이어는 사진이 지시하는 명확한 대상을 흐려내어 그것이 그곳에 존재했다는 분명한 연관관계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그리하여 작가의 사진은 자신이 가리키는 대상이 아닌 대상을 둘러싼 또 다른 감각적 경험의 발생을 유도하는데, 이와 같은 작업의 특이성은 대상의 서사에 집중함으로써 발생한다.
강지웅의 개인전 《Even hope decays… 희망조차도 부식하다니》는 지난 4년간 작가가 직접 경험하고 탐구해 온 서해의 무인도 ‘섬돌모루*’에 관한 사유의 바탕 위에 구축된다. 환상의 섬으로 등장했지만, 비운의 섬으로 막을 내린 섬돌모루는 누군가에게는 성공적 미래를 약속했던 기회의 섬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건설이 중단된 레저타운의 부식된 건물 잔해에서 욕망, 희망, 꿈, 믿음으로 뒤덮인 지난한 세월의 흔적을 발견한다. 섬돌모루의 존재 형태는 그곳의 서사적 맥락에 의해 형성되어간다. 존재를 외면당해야 했던 서글픈 실존 상태, 멈춰버린 시간 위로 공존하는 과거와 현재의 모습, 영원과 닿아 있는 믿음과 희망조차 자취를 감춘 채 누군가의 기억 속에만 어렴풋이 존재하는 섬. 작가는 이 작은 섬의 이야기들 위로 이 모든 것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린 ‘시간’을 주목한다.
2.
흐리고 분절된 사진 속 대상은 기록이 아닌 기억과 같이 존재한다. 〈무제(윗사람이 먼저 하는 인사)〉, 〈무제(젖은 요트 바닥)〉, 〈무제(사토르)〉는 섬돌모루 사진을 확대하고 분절하여 대형 천에 전사한 작업으로 전시 공간 곳곳을 차지하고 있다. 작가는 쪼개진 대상을 원본과의 대조가 아닌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행위를 통해 재조합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는 원본의 형상을 깨트린다. 이후 바닷가에 노출된 천은 각종 이물질과 부식을 통해 한층 더 뿌옇고 변질된 화면을 보여준다. 반면 새하얀 프레임에 정갈하게 전시된 〈무제(스키드)〉 시리즈는 섬돌모루의 분절된 이미지를 출력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산물이다. 틀에서 어긋나거나 기계의 결함으로 형성된 이미지의 오류는 무결한 종이 위에 출력되었지만 그 자체로 소실된 형상을 가진다. 작가는 자의적 조합, 부분적 상실과 오류, 어긋나버린 외형, 변질된 표면 아래로 대상의 존재 지표성을 지워낸다. 이는 섬돌모루의 실존 상태처럼, 투명한 사실보다 파편적인 기억을 닮아 있다.
작가는 이곳에 한 가지 지시를 더 해 존재의 모호함을 증폭시킨다. 〈감정에 호소하는 라스코〉, 〈오직 이 상호성 내에서만〉, 〈불명확한 동물〉, 〈통로, 회중석, 후진과 우물 평면도〉 등은 자투리 가죽 위로 수집한 빈티지 사진, 인터넷에서 발견한 도상을 찍어낸 뒤, 드로잉을 덧댄 작업이다. 마치 자연의 지형처럼, 혹은 고대 지도의 외곽을 닮은 비정형의 가죽 위로 출처 불분명의 이미지와 기호들이 어지러이 난무한다. 정보를 알 수 없어 불가사의 하면서도 신비롭게 느껴지는 이미지들은 무엇인가를 비유하고 있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 잊힌 그들의 근원처럼 공허한 표상으로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섬돌모루, 그리고 섬돌모루가 아닌 이미지의 혼재는 흥미로운 풍경을 제시한다. 오래된 빈티지 이미지는 실제로는 없는(혹은 알 수 없는) 것을 섬돌모루의 것처럼 가장(simulation)한다. 그리고 해체되고 부식된 섬돌모루 이미지는 실재하는 섬돌모루를 마치 없는 것처럼 은폐(dissimulation) 한다. 작지만 명증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섬돌모루〉(#17, #18, #33)만이 고요한 혼돈 속에서 간간이 존재의 실마리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사진의 몇몇 속성을 전복하고 의미의 전이를 감행한다. 지워진 대상은 사진의 투명성과 기록성을 거부한다. 천과 가죽에 전사된 사진 이미지는 기계성을 축소하고 주관적 행위를 강화한다. 보존 인화지가 아닌 거친 자연환경에 노출된 천은 빠르게 부식되어 가며 복제 가능성에 기반한 영원성을 제거한다. 작가의 작업은 사진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닌 사진에서 출발한다. 사진과 평면의 경계 위에 구축된 이미지는 존재와 서사, 그리고 시간성의 사유와 더불어 그 속에 내재한 파괴와 생성, 소멸과 순환에 관한 작업으로 확장한다.
3.
소멸과 상실의 기록은 반복되고 순환하는 시간의 개념을 소환한다. 작품 〈무제(침잠하는 바닷가…)〉는 작가가 섬돌모루에서 받은 인상이나 그곳에서 발견한 것을 기록한 짧은 글로 시작한다. 작가는 번역기를 이용해 자신의 글을 다른 언어로 번역한 뒤, 그것을 다시 한글로 재번역하는 작업을 반복한다. 번역과 재번역을 거치는 과정에서 본래의 문장과 단어는 조금씩 그 형상이 변형되어 간다. 부분적 상실이 일어나기도 하며, 부차적인 요소가 덧붙어 어색해지기도 한다. 변형된 외형 아래로 의미와 해석의 범주 또한 미묘하게 변화하고 있을 것이다.
전시 공간 한편에 자리한 〈그런 것들을 지녔던 사람들의 냄새를 맡지는 못한다〉는 섬돌모루의 폐허 공간을 기록한 영상 및 공간에서 진행된 사운드 퍼포먼스 작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방치된 건물 공간에서 읊조린 음성을 녹음한 뒤, 다른 녹음기를 이용하여 재생 및 녹음을 반복해 하나의 사운드를 만들어간다. 명확하게 구분되던 음성은 그 외형이 분해되고 흐려지며 본래의 목소리를 잃어간다. 이 행위는 최초의 음성이 공간 고유의 진동수로 변화할 때까지 반복된다. 최초의 발화는 공간과 하나가 되어 공명한다.
정적인 행위가 담긴 영상 작업은 특별한 장치나 가공 없이 섬돌모루에 방치된 공간에 흐르고 있는 일정한 시간을 보여준다. 아무도 살지 않는 텅 빈 공간은 언뜻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은은한 빛살이 그곳을 가득 메운 부유하는 먼지와 꽃가루를 드러낸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모를 먼지들은 분명 어디에선가 탈각되고 소실된 파편들일 것이다. 이들의 부단한 움직임은 다시금 어디론가 떠갈 것을 암시한다.
텍스트, 사운드, 영상 작업은 섬돌모루를 오가며 축적된 작가의 능동적 행위와 해석을 기저에 둔다. 작가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발생하는 상실의 기록을 추상적 형상으로 변화시켜 '그곳에 내가 있었다'라는 연관관계를 지워낸다. 어그러진 문자와 공명하는 사운드, 과거와 미래가 혼재된 영상의 변질되고 부분적인 파편은 오래된 시간을 재현함과 동시에 오랜 시간이 흘러 변질될 미래를 소환하며, 순환하는 시간을 보여준다.
4.
시간이 드리워질 때 견고한 대상은 변질되고 분명한 형상은 기억과 같이 흐려진다. 작가는 그 무엇도 고정될 수 없고,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사실 위로 하나의 질문을 던지는 듯 보인다. ‘실체가 보이지 않더라도 여전히 그것의 존재를 믿으시나요?’ 그러나 작가의 질문은 시간이 가진 절대적 힘 앞에 무력하게 놓이는 것이 아니다. 시간의 속성은 운동이자 변화이다.(Aristotle) 작가는 하강과 상승을 반복하는 역사와 생태적 순환 위에 자신의 질문을 던져둔다. 이는 뚜렷한 실체가 보이지 않더라도 지속해서 작업을 이어가야 할 작가로서의 실존에 관한 물음과도 연결되어 있다. 강지웅의 작업은 시간, 존재, 순환, 행위 그리고 희망에 관한 하나의 에세이처럼 제시된다.